지상 최대 '거벽' 부산 산꾼이 오른다 고도차 4500m의 직벽 품은 세계 9위봉, '마의 산' 삼엄한 경비 속 천신만고 끝 베이스캠프 입성 도착 직후 눈사태 불구 캠프4까지 무사히 진출 정상 등정 임박… "시민 염원 모아 목표 이룰 것"
2010 다이내믹부산 희망원정대원들이 세계 제9봉 낭가파르바트 캠프2~캠프3 사이의 대설사면 구간을 오르고 있다. 2일 현재 대원들은 캠프4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 마지막 정상 도전만 남겨두고 있다.
'다이내믹 부산 2010 희망 원정대'는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을 목표로 올 봄시즌 네팔 히말라야의 캉첸중가(8586m)를 네 번의 시도 끝에 정상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부산 시민의 염원에 보답할 수 있었다. 다음 목표는 세계 제9위봉 낭가파르바트(8125m)였다.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는 까슈미리(Kashmiri)어로 '벌거벗은 산(The Naked Mountain)'을 의미한다. 8000m급 고봉 중 캉첸중가가 히말라야의 가장 동쪽에 있는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다섯 개의 보석'으로 불리는 일출의 봉우리라면 낭가파르바트는 서쪽에 있는 '해가 지는 일몰의 산'이다.
자연의 위대함에 인간의 일생을 빗댈 수는 없지만 다섯 손가락을 꼭 쥐고 태어나 산등성이 같은 삶의 질곡을 거쳐 '벌거벗은 산' 낭가에서 빈손으로 떠난다고 히말라야를 숭배하며 살았던 인도인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한다.
'비록 히말라야를 보지 못하고 생각만 한 사람일지라도 카시(인도 평원의 순례성지)에서 수없이 경배를 드린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나는 히말라야의 영광을 다 말할 수 없다. 아침 햇볕에 이슬이 마르듯 히말라야를 봄으로써 인간의 죄는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다'. 힌두경전 스칸다푸라나는 그렇게 적고 있다. 지질학적으로 낭가파르바트는 유라시아판에 부딪힌 인도판의 제일 북측 언저리에 위치한다. 인도판은 1년에 5㎝씩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낭가는 히말라야 산맥 중에서도 가장 빨리 상승하고 있다. 영국의 지질학자 니겔 해리스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새로 개발된 '피션 트랙 데이팅'이라는 방법으로 측정한 결과 낭가파르바트는 해마다 1㎝씩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히말라야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융기 속도가 거의 두 배나 빠르다. 따라서 15만 년 후 세계 최고봉에 오르려는 등반가들은 에베레스트 정상이 아닌 낭가파르바트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산에서 만난 다양한 옛 자취
베이스캠프를 덮친 눈사태 후폭풍.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우리는 다음 날부터 바삐 움직였다. 입산에 필요한 행정 처리와 구도시 라왈핀디에서 부족한 장비, 식량을 구입하느라 비지땀을 흘리며 등반 준비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캉첸중가 등반 후 네팔 카트만두에서 보낸 항공화물이 파키스탄 카라치공항의 세관과 파키스탄항공사 문제로 화물이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예정보다 이틀을 더 기다린 끝에 이슬라마바드를 떠날 수 있었다.
이슬라마바드와 페샤와르를 연결하는 그랜드트렁크 로드(Grand Trunk Road)를 벗어나자 길은 카라코람하이웨이(Karakoram Highway)로 연결됐다. 일명 'KKH'로 불리는, 국가 간을 연결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로다. 파키스탄 중부에서 북부로 그리고 더 뻗어나가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카시가르까지 1200㎞ 이어진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세계 8대 불가사의'에 이 도로를 넣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길이 현대화된 포장도로로 거듭나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이었는지를 반증한다. 공사에 투입된 공사인부 1000여 명의 희생을 바친 결과물이다.
말이 '하이웨이'지 길의 상태는 비포장도로나 다름없다. 달리는 속도는 시속 20㎞를 넘지 못했다. 인더스 코히스탄(Indus Kohistan) 지역은 길도 위험천만이지만 치안상태 또한 마찬가지다. 이 지역은 영국 식민시대부터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 곳으로, 파키스탄이 개국한 이후에도 공권력 부재지역이다. 현재 만세라(Manshera)에는 탈레반 훈련캠프가 있다. 이곳 부근 도로에서 밤에는 자동소총을 소지한 현대판 산적이 가끔 출몰한다. 그래서 구간별로 경찰이 차량에 동승해 외국인들을 보호하는 위험한 지역이다. 우리는 17시간의 운행 끝에 인더스 강변 모래사막에 자리 잡은 낭가파르바트 등반 기점인 칠라스에 도착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동이 트자 동쪽에서 흰 설산이 나타났다. 하지만 낭가파르바트는 구름에 가려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구입, 부나르다스에서 4개 마을에서 모인 40여 명의 포터들에게 짐을 분배했다. 그리고 남은 오후의 자투리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원정 등반이란 단지 산을 오르는 것만이 아니다. 산으로 향하면서 특히 만나는 사람, 다양한 문화 속으로 들어가 옛 자취를 더듬어 나가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겼다. 과거의 시간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주위는 온통 메말라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는 땅이었다. 인더스 강변의 흑갈색 바위에 수많은 스투파와 마애불이 새겨져 있었다.
■'마의 산' 낭가파르바트 도전사 & 헤르만 불
부나르다스 포터들.
6월 19일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던 칠라스를 떠났다. 부나르계곡 수백 길 절벽 위에 건설된 길로 접어들자 지프차 엔진의 파열음은 짐칸에 매달린 우리들의 귀를 자극했다. 2시간의 운행 끝에 디아마로이(Diamaroi) 마을에 당도할 수 있었다.
도보 캐러밴이 시작됐다. 급류 위에 매달린 줄다리가 어렸을 적의 아찔한 모험심을 불러 일으켰다. 숨이 막히는 뜨거운 공기와 가파른 비탈길은 디아마로이 원주민의 전설에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살고 있는 신성한 정령들의 거처(The Abode of the Fairies)에 입산하려면 세속의 때는 벗고 오라는 듯 연신 땀을 쏟아내게 한다. 히말라야 등반가에겐 높아서 익숙한 곳에 점점 다가서고 있었다. 돌집으로 이루어진 마을 젤(2800m), 말 염소 양들이 풀을 뜯는 쿠티갈리(3800m)를 거쳐 캐러밴 3일 만에 드디어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 베이스캠프(4200m)에 도착했다.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로 마모트(Marmot)가 삑삑 울러대는 야생화 초원이다.
낭가파르바트의 높이는 세계 제9위밖에 되지 않지만 옛날부터 유명하기로는 에베레스트나 칸첸중가에 못지않다. 히말라야 등산사에서 가장 극적인 파란과 비극을 되풀이한 산이며 일곱 번이나 끈질긴 도전 끝에 초등반이 된 산이다. 초등정되기 전까지 31명이 희생되면서 한때는 '마의 산' 또는 '죽음의 산'이라고도 불렸다. 이 난공불락의 낭가가 드디어 1953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동대에 의해 초등정된다.
쿠티갈리에서 본 낭가파르바트 전경.
오스트리아인 헤르만 불은 혼자서 인간의 힘으로는 믿기 어려운 초능력을 발휘하며 정상에 도달했다. 등정을 증명하기 위해 눈 속에 피켈을 꽂고 티롤산악회와 파키스탄 국기를 매달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하산 도중 날은 어두워졌다. 그는 침낭이나 비박색도 몸을 확보할 자일도 없었다. 급준한 암벽에서 오른손으로 바위를, 왼손으로는 스키스틱을 잡고 몸을 지탱한 채 고통의 하룻밤을 보냈다. 8000m의 고도에서 이런 상태로 무사히 밤을 지새웠다는 것은 천우신조의 기적이랄 수밖에. 당시 27세의 청년 헤르만불은 40시간여 만에 60대 노인의 모습으로 마지막 캠프로 돌아왔다.
그러나 팀의 분열로 대장인 헤르리히코퍼는 공공연히 불의 등정을 부인하고 끝내 불을 법정에 재소한다. 헤르리히코퍼가 볼 때는 불은 대장의 명령을 불복종한 자로써 헤르만의 등정은 그의 성공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는 불의 편이었다. 1999년 정상에 두고 온 불의 피켈이 일본 원정대에 발견된다.
영국이 무려 9번의 도전 끝에 초등정한 에베레스트가 영국인의 산이라면, 낭가는 어디까지나 독일의 산이었다. 1963년 다른 루트로 등정하려는 계획이 진행됐다. 1895년 머메리가 계획했다가 실패한 서벽의 디아미르 벽에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 킨쇼퍼 등 3명이 재등을 이루면서 우리 팀이 등반하려는 킨쇼퍼 루트를 탄생시켰다.
이어서 이 산의 남면 루팔벽에 도전한다. 이 벽은 세계 제1의 험한 벽이라고 부를 정도로 위에서 아래까지 4500m를 직벽으로 내려 깎아 떨어져 있었다. 1964년 2~4월에 9명으로 구성된 등반대가 루팔벽 아래로 들어왔다. 독일은 이후 4번의 도전 끝에 1970년 메스너 형제와 펠릭스 쿠엔, 페트 숄쳐 등에 의해 루팔벽 직등루트를 완성시켰다.
■베이스캠프 입성 다음 날 등반 시작
캠프1에서 캠프2로 진출 중인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원. 캠프2 직전 대암벽 구간은 무려 100m가 넘는 직벽이다.
우리는 베이스캠프 입성 다음 날 곧바로 등반을 시작, 킨쇼퍼 루트상의 캠프1(5000m)에 한 동의 텐트를 설치하고 장비와 식량을 운반했다. 베이스캠프로 하산한 직후 낭가파르바트 남서쪽에 위치한 마제노봉(7126m) 상단부 사면에 걸쳐져 있던 대형 세락이 붕괴. 눈사태를 일으키며 그 후폭풍이 베이스캠프를 덮쳐 텐트 4동이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대원들은 미리 피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폴란드와 미국팀의 베이스캠프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됐다. 6월 25일 오전 6시께 서성호 김창호 김진태 대원은 고소적응 등반을 위해 베이스캠프를 출발, 14시간 만인 오후 8시께 1800m의 고도를 극복하고 전원 캠프2(6000m)에 도착했다. 전날 눈이 내리는 가운데 캠프1~캠프2 구간에서 평균 경사 50도의 무릎까지 빠지는 설사면과 직벽에 가까운 100여 m 대암벽지대를 통과하느라 거의 탈진 상태였던 대원들은 캠프2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오전 6시 30분께 캠프2를 출발한 대원들은 4시간의 운행으로 6600m 지점에 있는 폴란드팀 캠프3을 지나 낮 12시30분께 캠프3에 도착했다. 우리 팀의 캠프3은 해발 6850m 지점으로, 큰 바위 밑에 위치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다. 캠프3에서 하룻밤을 보낸 대원들은 28일 오전 6시30분께 하산을 시작, 캠프2~캠프1을 거쳐 4시간30분만인 오전 11시께 고소적응 등반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헤르만 불은 초등정 후 자서전 '8000미터 위와 아래'에서 낭가파르바트는 '오직 희생만을 요구할 뿐 아무 것도 주지 않는 냉엄한 거인'이라고 했다. 우리는 차분한 가운데 정상을 향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인샬라".
# 낭가파르바트와 한국인의 인연
- 1300년 전 혜초·고선지 거쳐간 山
통상 히말라야는 인도의 신화에 등장해 서구인의 탐험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낭가파르바트는 그렇지 않다. 이 산과 한국인과의 관계는 혜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 학자이자 탐험가인 폴 펠리오(P. Pelliot)는 중국 돈황의 천불동에서 각종 경전을 비롯해 고문서와 불화 등 국보급 문화재 29상자를 수집했다. 그 중에서 앞뒤가 잘려진 필사본 두루마리 하나도 포함돼 있었다. 이후 그것은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라는 것이 그에 의해 연구 발표됐다. 하지만 혜초는 인도로 구법여행을 했던 법현, 현장과 같이 단지 중국인 스님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1915년 일본학자 다카스키가 '혜초전고(慧超傳考)'를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혜초가 신라 스님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6000여 글자밖에 되지 않는 두루마리의 내용 중에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길기트(小勃律國)와 스카르두(大勃律國) 지역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1300여 년 전 그가 걸었던 길을 좇아 '왕오천축국전'의 기록을 살펴보자.
'가시미라국(迦葉彌羅國·지금의 인도 스리나가르 지역)에서 북서쪽으로 산을 사이에 두고 7일을 가면 소발률국(小勃律國·지금의 길기트와 야신 지역)이 있다…중략…산천이 협소해 논밭이 많지 못하다. 그 곳 산은 메말라 원래부터 나무나 온갖 풀이 없다'.
혜초의 길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혜초는 723년 중국 광주를 출발해 배로 동천축국에 들어와 727년 11월 중국 서역 안서도호부 쿠차에 도착할 때까지 5년간 구법여행을 했다. 그 일정에 비정해 보면 726년쯤 이 지역을 지나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스리나가르에서 길기트 지역에 갈 수 있는 쉽고 가까운 길은 대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가장 낮은 고개, 바로 부르질 고개(Burzil La)를 넘어 낭가파르바트의 동쪽에 있는 아스토르를 경유하는 루트다. 이 길은 예부터 중국 서역과 인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하나로, 19세기 탐험가들과 20세기 원정대도 같은 길을 이용했다. 이 루트의 여러 곳에서 낭가파르바트가 보인다. 결국 기록상으로 혜초가 낭가파르바트를 본 최초의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패망한 고구려의 유민 고선지는 당나라의 장군이 되어 서역의 부절도병마사로 당시 토번(티베트)과 아랍의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구축하려 하자 당 현종의 칙령으로 747년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이들은 파미르를 횡단, 와칸지역에서 티베트를 격퇴하면서 도주하는 적을 쫓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선의 브로길 고개와 힌두라지의 다르콧 고개를 넘어 길기트를 점령했다. 따라서 고선지는 혜초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낭가의 산군을 본 사람으로 기록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팀 현지 대행사 사장으로, 전 파키스탄 북부주 국회의원이자 현 파키스탄산악협회 회장인 나지르 사비르도 영국인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의 저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 협찬 : 경남정보대학, mont-bell, DRB 동일
파키스탄 히말라야=홍보성 원정대장· 정리=이승렬 기자 입력: 2010.07.01 20:21